박장희 (대한의료정책학교 공보처, 전공의)
대한민국 공공병원은 지금 중대한 딜레마에 서 있다. 국민의 80% 이상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실제 공공병원의 이용률은 절반 수준인 40%에 그치는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최근의 의료 공백 사태를 겪으며 공공의료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국민의 발길은 여전히 민간병원을 향하고 있다.
공공병원의 현실은 암담해 보인다. 전국 35개 지방의료원의 2023년 기준 병상가동률은 평균 46.4%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80.5%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2024년 의료손실 규모는 6,391억 원에 달해, 2019년(1,437억 원)의 4.4배에 이른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정부가 공공병원의 양적 확대에만 집중하며 정작 그 역할과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국민의 세금이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데 가장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공공의료 담론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실용과 원칙의 문제이다.
공공의료 강화 논의에 앞서, 우리는 '공공의료'의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공공의료'란, ‘공공기관의 의료’가 아닌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의료'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건강보험 의료' 전체가 사실상 '공공의료'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의료보험 도입 당시 공공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민간의료기관을 강제 지정하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제정했다. 이는 건강보험 사업에서 제외되는 의료기관이 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전체 의료기관의 90% 이상인 민간의료기관 역시 ‘공공의료'를 제공하며, 민간이 공공의료를 대행하는 구조가 역사적으로 우리 의료체계의 근간인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민간의료기관을 단순 규제의 대상이 아닌, 공공의료의 핵심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전공의 사직으로 인한 의료 공백 사태는 수련병원들이 그동안 공공의료의 주축 역할을 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앞으로 수련병원들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또 한편, 정부는 2023년 9월 병원급 의료기관을 시작으로, 2024년 4월부터 모든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비급여 보고의무를 확대한 바 있다. 이런 '비급여 모니터링'을 부정적 규제 대신, 비급여 항목을 적정 수준으로 ‘합리화’하는 병원에 대한 보상 제도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공병원 신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공공의료 강화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연지정제 하에 모든 의료기관이 ‘공공의료’를 제공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공공병원 고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 공공병원의 경영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41개 지역거점 공공병원은 지난해 총 6,391억 원의 의료 손실을 기록했으며, 이는 병원당 평균 156억 원의 적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공공병원의 적자는 종종 ‘착한 적자’로 불리지만, ‘착한 적자’란 필수의료나 응급·중증환자 또는 취약계층 진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난 12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의 실제 공공병원 이용 경험은 40% 내외에 불과하며, 2024년 기준 중증질환 이용률은 14.2%에 그쳤다. 지역거점 공공병원의 환자 수는 최근 5년 사이 약 30%나 감소했다. 전국 35개 지방의료원 중 ‘포괄적인 2차 병원’으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갖춘 곳은 단 4곳뿐이다. 이는 공공병원의 적자가 진료 역량 부족과 직결되어 있으며, ‘착한 적자’라는 논리와는 상충함을 보여준다.
공공병원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여러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력 확보의 악순환을 부추기는 인건비 규제>
공공병원은 공공기관운영법에 따라 기획재정부가 정한 인상률 상한 내에서만 인건비를 책정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민간병원에 비해 현저히 낮은 보수만을 지급할 수 있으며, 필수의료 분야의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와 환자 이탈, 경영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정부는 작년부터 의료 공백 사태에 대응해 인건비 규제를 완화하며 ‘필수의료 유지 특별수당’을 신설하였으나, 이는 한시적 조치에 불과하다.
<경영 자율성 부재와 거버넌스 문제>
지방의료원의 경우, 병원장의 경영 권한이 제한되어 조직 혁신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기가 어렵다. 예산 수립부터 인사 채용까지 지방자치단체의 통제를 받고, 지방의회 및 감사 리스크로 인해 소신 있는 책임경영을 펼치기 힘든 구조이다.
<경영 혁신을 가로막는 경직된 조직문화와 노사 갈등>
공공의료기관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생산성 증대를 저해하는 경직된 조직문화와 노조의 역기능이다. 공무원식 호봉제 임금 체계와 장기근속자 중심의 조직문화로 인해 '더 많이 일하거나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만연하다. 보건의료노조는 임금 인상, 주4일제 등을 요구하면서도 업무 강도 증가나 효율성 제고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비합리적 근로환경이 조성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병원의 본질은 '근로자'가 아닌 '환자'를 이롭게 하는 데 있음을 명심하고, 성과와 역량 중심의 경영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공공병원이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의사 양성에만 10년 이상 소요되는 공공의대 설립은 당장의 인력난에 대한 해답이 되기 어렵다. 지금 즉시 실행 가능한 대안에 집중해야 한다.
<성과 기반의 책임경영제 도입>
원장에게 명확한 목표와 권한을 부여하고, 그 성과를 투명하게 평가하는 성과계약제를 도입해야 한다. 2024년 보건복지부가 시행한 '공공병원 경영혁신 지원사업'처럼, 기관별 혁신 계획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센티브와 책임을 부여하는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저성과 기관에 대해서는 경영진 교체, 구조조정 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 다만, 수익성 중심으로 진료가 왜곡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수익보다는 필수의료 및 응급·중증환자, 취약계층 진료 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특히 민간의료기관이 부재한 의료 사각지역에 위치한 병원에 대한 공공의료 기여도가 반영되어야 한다.
<응급·중환자 우선책임제도 확립>
공공병원의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지역별 응급·중환자에 대한 ‘우선책임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119 구급대가 응급환자 발생 시 공공병원에 우선 연락하도록 지정하고, 전원 수용률을 평가해 실적이 저조한 기관에는 개선 조치를 취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다만, 초기에는 기관별 역량에 따른 수용 상한제를 설정하도록 하고, 주기적인 평가를 통해 상한제를 조정하도록 한다.
<자율적 처우 개선을 위한 인건비 규제 완화>
인건비 규제를 법적으로 완화하고 정부가 2024년 도입한 '필수의료 유지 특별수당' 제도를 확대하여, 공공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필수의료 종사자들의 처우를 현실에 맞게 개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교수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지원하고, 소수의 인원이 막대한 책임을 지는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 의사뿐만 아니라 응급실·수술실·중환자실 등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응급구조사 등이 우수한 ‘팀’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민간병원과의 격차를 줄여 인력 이탈을 막는 핵심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공공병원의 위기는 단순한 경영 부실을 넘어, 민간 중심 의료체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정부가 시범 운영 중인 ‘공동수련제도’ 역시 구조적 장애물이 해결되지 않으면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실용주의 이재명 정부’의 시대, 병상 수 확충과 같은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 중심의 근본적 구조개편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적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민간의료기관은 공공의료의 파트너로서 그 역할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한편, 공공의료기관에는 성과와 역량 중심의 책임경영을 도입해야 한다. 경영 자율성과 책임을 강화하고, 응급·중환자에 대한 최종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할 때, 공공병원은 비로소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이 신뢰하고 기꺼이 이용하는 진정한 공공의료를 만드는 길이자,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핵심 과제이다.